2019 Praise of Life Offered to the Isolated Individuals in the Group (By Taesuh Kim)
집단 속 고립된 개인들에게 바치는 삶의 찬사
김제민의 ‘식물 드로잉’을 보고 있자면 일차적으로 차분함, 고요함, 또는 치유와 같은 단어들을 떠올리게 된다. 식물이라는 소재가 함유하는 초록의 빛깔과 관조적이고 명상적인 이미자는 보는 이로 하여금 이에 어울리는 평화로운 심상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품 속의 풀과 나무들이 그렇게 고요하고 명상적인 상태가 아님을 깨달을 수 있다. 인간이 식물에 대해 가진 고정관념과는 다르게, 엄연히 엄혹한 생태계 속에서 몸부림치며 살아가는 식물들의 상황은 평화롭지도, 사색적이지도 않다. 각각의 풀과 나무들은 좁은 틈바구니에서 어떻게든 뿌리를 내리고 가지와 줄기를 꼬아 얽어가며, 현실의 냉혹한 상황 속에 자신을 적응시킨다. 더 나아가 이 식물들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자신의 의지로 뿌리를 뽑아내어 마치 사람처럼 몸을 움직이며 스스로를 단련한다. 약간은 만화적이면서 가벼운 터치로 그려내는 의인화한 식물들은 피식 웃음을 짓게 만들지만, 뿌리내리지 못하고 안간힘을 쓰는 식물들을 바라보면서 마음 한 편에 안쓰러움이 쌓이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게 보살핌을 받지 못 해 어그러진 형상을 하거나 애처롭게 사람 흉내를 내는 식물들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마주할 수 있지만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품종이 무언지도 잘 알지 못하는 “잡초”들이다. 잡초는 다른 ‘유익한’ 식물들이 자라나는데 방해가 되는 존재이자, 밟거나 뽑아내도 끈질기게 다시 돋아나는 질긴 생명력을 상징한다. 특별한 쓸모가 있거나 보기에 아름답지도 않은, 그저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잡초의 보잘 것 없지만 강인한 생명력은 우리에게 생명의 원초적인 힘과 가치를 상기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모습을 바라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우리들의 인생 역시 이들 잡초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지나치며 발에 채는 별 볼일 없는 익명의 존재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들 역시 주어진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하며 어떻게든 하루하루를 버텨나가는 덧없으면서도 소중한 생명인 것이다.
얼핏 들으면 굉장히 무겁고 우울한 얘기처럼 들리지만 실제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스스로의 인생을 그다지 괴롭기만 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김제민의 작품 속 잡초들도 곤란하고 예측할 수 없는 삶을 의외로 느긋하고 익살스럽게 견뎌나간다. 흔히 “민초(民草)”라고 표현하는 불특정 다수의 삶을 관찰하고, 그 속에 녹아있는 애환과 모순을 드러내며, 이를 극복해나가려는 의지를 다짐한다는 점에서 김제민의 작업이 “민중미술”과 가지는 연관성을 떠올리기는 어렵지 않다. 자세한 관찰과 묘사를 지양하고 간결한 선과 색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조형적 특성을 만들어간다는 점에서도, 김제민의 작업을 민중미술의 계보에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김제민의 작업에서 드러나는 우리 사회와 삶의 부조리는 그렇게 극적으로 표현되지 않으며, 이에 대한 극복의지도 그다지 결의에 차있거나 심각하기보다는 의뭉스럽고 유머러스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기존의 민중미술과 같은 맥락에 위치하면서도 형식과 내용 면에서 결을 달리하는 김제민의 작업 특성을 결정하는 요소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세대적 측면으로 1970년대 초반(1972년) 생인 작가는 우리가 소위 이야기하는 학생운동의 마지막 세대에 해당한다. 20대 초반 대학 신입생 시절 학생운동에 참여했던 작가의 이력은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그 안에서 구성원 개인이 겪는 부조리에 대한 관심을 촉발하였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작가는 이른바 “X 세대”라 일컬어지는, 1990년대의 신자유주의와 소비주의 풍조 속에서 개인적 욕망과 감정에 집중하기 시작한 첫 번째 세대이기도 하다. 이렇듯 정치, 사회, 문화적 전환기라 할 수 있는 1990년대에 20대를 보낸 작가는, 기존 민중미술의 사회고발적이고 계몽적인 주제 상의 특성을 드러내면서도 이를 좀 더 개인적이고 내밀하게 표현하는 방식상의 차별점을 가지게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또 다른 측면은 작가의 다문화적 배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국의 민중미술은 국외의 자본주의·제국주의 세력에 대항하는 ‘단일민족’이라는 공동체적 결속감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측면에서 한국-미국계 혼혈인으로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쉽게 정의내리지 못했을 김제민에게 주어진 문화적 정체성의 혼란이, 이 사회에 쓸모 있는 ‘단일종’으로 재배되는 작물들의 생장과 번성을 저해하는 잡초로서의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하였으리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단일한 정체성에 자신을 편입하지 못하는 입장에서, 작가는 이 사회를 살아가는 구성원들의 외부에서 가해지는 압력에 대한 항의와 저항을 드러내기보다는, 개개인이 우리 사회의 부조리에 어떻게 대응하고 적응하며 이를 극복해 나가는지에 대한 내면적 관찰로 시선을 전환하였는지도 모르겠다. 김제민의 작업에서 드러나는 식물들의 양태는 절박한 외부의 환경에서도 무관심에 가까운 일상성을 유지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드로잉이라는 형식상의 특징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드로잉은 대체로 하나의 미적 단위로서 작품이 완성되는 과정에서 선행하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평면실험들을 의미한다. 부드럽고 경쾌한 선묘와 담담한 채색으로 이루어진 김제민의 드로잉 작품들은 그 자체로 미적 완결성을 가지기보다는, 개별 작품들이 만들어내는 서사의 연관성에 집중할 때 좀 더 깊은 이해가 가능하다. 1980년대의 ‘판화운동’과 연계되었던 민중미술 역시 현장미술이자 르포미술로서 개별 작품 단위의 감상보다는 다양한 작품들이 만들어내는 전체적인 맥락에서 그 의미망을 형성해 나가는 미술형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무판을 칼로 깎아내려간 날 선 형상과 강렬한 채색으로 공격적인 자기주장을 만들어내는 기존 민중미술의 형식과 비교해 봤을 때, 김제민의 ‘드로잉’ 작업들은 집단운동의 지향을 드러내기보다는 훨씬 개별적인 감상과 감정의 소회를 드러내는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이에 대하여 조금 부연을 하자면, 같은 이미지를 반복 재생산하는 목판화는 민중미술 운동을 통해 빠른 제작에 따른 일괄적인 메시지의 전달에 특화한 매체로서 기능하였다. 따라서 당시의 판화작품들은 조형적 측면에 있어서도 설명적이고 전형적인 형태를 만들어내는데 집중하였다. 반면에 손 가는대로 그리는 것 같은 김제민의 드로잉은 여유롭고 유쾌하면서도 어딘가 위태로워 보이는 식물들의 내면심리를 표현하는 개성적인 작가의 필치를 드러냄으로써, 작품 속 식물들과 감상자 간의 심리적인 공감대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한다. 이는 드물지 않게 제작하는 작가의 목판화 작업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조형적 특징으로서, 이러한 목판화에 대한 접근방식의 차이는 기존의 민중미술과 비교하여 김제민의 작업이 가지는 차별성을 파악할 수 있는 예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제민이 식물(그 중에서도 특히 잡초)을 통해 현대인이 처한 고단한 삶의 여러 단편들을 살펴보고 이에 대한 극복의지를 드러내는 방식은 소박하면서도 특별하다. 잡초라 불리는 정의할 수 없는 거대한 군집은 그 자체로 우리 사회의 특성을 반영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특정 집단의 일원으로 상정하고, 이에 소속됨으로써 그에 따른 안정감을 느끼고자 노력한다. 이는 원자화한 현대인의 고독과 불안에 대한 근원적인 두려움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집단성에의 열망은 너무나 사소한 차이들로 인해 또 다른 고립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집단성에의 추구에서 잠시 벗어나 홀로 내가 뿌리내린 (혹은 뿌리내리고자 노력하는) 바로 그 자리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주위를 둘러보면 비슷한 수많은 개인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김제민은 작업을 통해 게으르고, 깊이 생각하기 싫어하고, 쉽게 포기하고, 아무 짝에도 쓸모없지만, 작은 일상 하나하나가 소중하기 그지없는 바로 ‘나 자신’의 삶에 대한 경의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김태서 (작가, 서울대학교미술관 학예연구사)
Praise of Life Offered to the Isolated Individuals in the Group
Looking at Jeimin Kim’s “plant drawings,” the first words that come to mind are calmness, quietness and healing. The shades of green, and contemplative, meditative images connoted by the subject matter of plants, evoke peaceful imagery in viewers’ minds. But if we look just a little bit closer, we soon realize that the grass and trees in the works are not in such a tranquil or meditative state. Unlike humans’ fixed ideas about them, the situation of these plants, which struggle fiercely to survive in a harsh ecosystem, is neither peaceful nor contemplative. Each blade of grass, each tree, uses all possible means to lower its roots, to twist and turn its branches and stems, determined to adapt to the cold reality. In the effort to adjust to their situations and settings, these plants pull out their roots by their own volition, and move their bodies like humans, training themselves. While the personified, somewhat comic plants, drawn in light strokes, induce smiles and chuckles, an undeniable feeling of pity begins to accumulate in a corner of our minds, as we watch the plants struggling in vain, unable to take root.
These plants in their contorted forms, uncared for and pathetically imitating humans, are the “weeds”—plants that we commonly encounter in our surrounding environment, yet we take no interest in them, and few of us know them by name. Weeds are beings that interfere with the growth of other, more “beneficial” plants, and symbolize a tenacious life force, as they stubbornly grow back despite efforts to pull them out or trample them down. The insignificant yet powerful life force of the weed, which lives simply to survive, without any particular usage or aesthetic charm, often reminds us of the primordial force and value of life. Gazing at these images, we come to realize that our lives are not so different from theirs. Though they are nothing but anonymous beings under our feet, after all, we can also be seen as limited but precious living beings, doing our best to endure each day under the given circumstances.
Though at first this may sound like a heavy, gloomy story, as we do not actually consider our own lives to be constant torment, the weeds in Kim’s works also endure their difficult and unpredictable lives in unexpectedly relaxed and jestful ways. In that his art observes the lives of the unspecified group of individuals often referred to as the “Mincho (grass roots),” reveals their joys, sorrows and contradictions, and pledges the will to overcome, it is not difficult to associate it with Minjung Art. The fact that the artist uses simple lines and color combinations for his subjects, rather than detailed observation and depiction, is another aspect we can consider in trying to understand Kim’s work within the genealogy of Minjung Art. However, the irrationalities of our society and life shown in Kim’s works are not portrayed as dramatically as in Minjung Art, and the will to overcome the hardships is not filled with determination or seriousness, but rather is portrayed subtly and humorously.
The elements that decide the characteristics of Jeimin Kim’s works, which share the same context as the earlier Minjung art, yet are different in terms of form and content, can be categorized into three aspects. One is that of generation, as Kim, who was born in the early 1970s (1972), belongs to the final generation of the so-called student movement. The artist’s experience of participation in the student movement as a university freshman in his early 20s must have triggered an interest in the structural problems of Korean society and the irrationalities suffered by the individuals composing it. At the same time, he also belonged to the first generation—also known as the “X generation”—to focus on personal desires and emotions amidst the neoliberalism and consumerism of the 1990s. Thus, in my opinion, by spending his 20s in the 1990s, which may be called a political, social and cultural transition point, he came to reveal such characteristics of Minjung art as social criticism and enlightening themes, but also developed a unique method of expression that was more personal and intimate.
Another aspect can be found in the artist’s multicultural background. Korean Minjung art in many cases emphasized the communal bond as a “single nation,” a homogenous ethnic group standing against foreign capitalist and imperial forces. Therefore, it is not difficult to assume that the confusion of cultural identity presented to the artist, who as one with both Korean and American lineage would have experienced difficulty in determining “Who am I?”, led to the formation of a new identity as weed, something that interferes with the growth and exuberance of crops grown as monoculture or useful to society. As someone who could not comfortably place himself within such a single identity, the artist, rather than expressing protest or resistance against the external pressure applied by social constituents, perhaps turned his gaze toward an internal observation of how individuals cope with, adapt to, and overcome irrationalities in our society. In appearance, the plants seen in Kim’s works thus maintain a certain casual, everyday character, almost indifferent to the desperate exterior environment.
Finally, I must mention the formal characteristic of drawing. Drawing generally signifies the relatively “light” experiments on the plane that precede the process of completing a work as an aesthetic unit. Jeimin Kim’s drawing works, consisting of soft, nimble lines and subtle colors, can be understood more deeply when we focus on the relevance of narratives created by each individual work, rather than their aesthetic completeness. Minjung art of the 1980s, which was closely linked to the “printmaking movement,” was also an art form that built its network of meaning in an overall context made by diverse works, rather than the appreciation of individual ones. It was a kind of field art, and reportage art. But compared to the forms of previous Minjung art, which made aggressive claims through sharp images cut into wood with a knife, and intense colors, Kim’s “drawing” works do not reveal the aims of a collective movement, but rather evoke an effect associated with much more individual impressions and emotions.
To elaborate on this, the woodcut print, which repeatedly reproduces an identical image, functioned as the most appropriate medium for communication of bulk messages through rapid production to serve the purpose of the Minjung art movement. Therefore, in their formative aspect as well, print works at the time focused on making explanatory and typical images. In contrast, Kim’s drawings, which look as if he has drawn them by letting his hand go freely, succeed in creating a psychological bond of sympathy between the plants in the works and the viewers, by revealing the unique touches of the artist expressing the inner psychology of the plants, which are leisurely and cheerful, yet also appear precarious in some way. This is a formative characteristic also discovered in the artist’s woodcut prints, which he often makes, and this difference in approach to woodcut printmaking is a good example of the difference between previous Minjung art and Kim’s work.
The method by which Jeimin Kim explores the various aspects of the weary lives of contemporary people through plants (particularly weeds), and reveals the will to overcome such hardships, is simple but special. The gigantic, undefinable group called weeds reflects the characteristics of our society itself. We assume ourselves to be members of a certain group, and make efforts to feel the stability associated with belonging. Perhaps this is due to the contemporary atomized human’s fundamental fear of solitude and instability. But the desire for such collectiveness can cause another kind of isolation due to very small differences. If so, there may be a need to temporarily escape from that pursuit of collectiveness, and take a look at the very place we have taken root (or are working to take root). If we look around, we will likely discover numerous individuals in similar circumstances. Through his work, Jeimin Kim is expressing respect for his own life, which may be lazy, reluctant to think deeply, and prone to giving up easily, but is utterly precious to its last, smallest, ordinary event.
- Taesuh Kim (Visual Artist; Curator, Museum of Art, Seoul National Univers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