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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Wonder-Pul Life

2016 원더풀 라이프 (Wonder-Pul Life)

드로잉 단상

척박한 도시의 곳곳에서 적응하며 살아가는 풀

우리는 그들을 ‘무단점거자’라 여기지만 어쩌면 본 주인은 그들이고 우리가 불청객일지도 모른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주위에서 도시의 환경에 적응하며 끈질기게 버티며 살아가는 풀들에게 눈길이 갔다. 딱딱하고 인공적인 지형지물 사이에서 집요하게 자리잡고 주어진 환경에서 강한 생명력으로 자라나는 풀들은 경이롭게 느껴지기도 하고, 때로는 어떻게든 버티고 살려고 안간힘 쓰는 모양새가 내 모습 같아서 자조적 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

풀이야말로 자연의 완벽한 드로잉이고, 나는 그저 그것을 따라 그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콘크리트 벽과 아스팔트, 다양한 소재의 인공물을 배경으로 유기적인 선을 그리며 뻗어나가는 풀은 마치 종이 위에 자유롭게 그려지는 드로잉의 필선을 닮았다. 인공과 자연은 그렇게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묘한 긴장감을 형성하며 함께 공존한다. 그 생생한 ‘드로잉’의 현장을 내가 다시 드로잉한다. 식물이 고정되어 있는 듯하지만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으며, 드로잉은 정지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움직임을 내포하고 있다. 도시 속에 자리잡은 풀이 끊임없이 영역과 경계를 넘나드는 것처럼, 나의 드로잉도 영역과 경계의 초월을 지향한다.

여러 상황에 놓인 풀들을 보고 그리면서 그들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근래에는 풀에게 ‘관조자’라는 입장을 부여해 보았다. <춘망(春望)>에서 두보(杜甫)는 나라가 망하니 초목만 우거졌다고 한탄하며 인간사의 덧없음을 노래한다. 풀은 비록 한두 해 살고 죽지만 끊임없는 생-사의 순환 속에서 자연의 일부로서 영속성을 지니는 반면, 인간 문명은 영원할 듯 보이지만 오히려 자연의 시간 속에서는 찰나에 지나지 않으며 덧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작금의 여러 가지 이해할 수 없는 사태들을 접하면서, 묵묵히 우리를 지켜보며 비웃고 있을 풀들을 상상한다. 그리고 역시 풀처럼 관망할 수 밖에 없는 내 처지를 생각한다.

김제민

2016. 9.

전시서문

잡초 그림 ● 오래 전의 대중가요 중에 가수 나훈아가 부른 '잡초'라는 노래가 있다. 가사의 내용을 요약 해보면 대충 이렇다. 아무도 찾지 않고 이름도 모르며 꽃도 피지 않고 손이 없어 님을 잡을 수도 발이 없어 님께 갈수도 없다는 잡초 입장에선 무능력하기 그지없는 내용이다. 결국엔 정체성과 존재감이 모호하고 매력도 능력도 미약하여 사랑하는 대상에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인데 잡초는 위의 가사 내용처럼 '쓸모없음'의 대명사이지만, 이외에도 강인한 생명력의 아이콘(icon)이기도 하다. 이것이 잡초가 갖고 있는 반전의 매력인데 지구상에 씨앗이 어떻게 뿌려 졌는지, 언제부터 생육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분명한 것은 지구상에 포유류가 탄생하고 정착하기 수십만 년 전부터 식물들이 이 땅의 주인이었다는 사실이다.

대략 46억년이 흐른 지금의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잡초들은 천덕꾸러기들이 되어 있다. 인간들은 애초에 주인이 누구인지, 망각하고 눈에 보이는 대로 뽑고 또 뽑고 없애느라 분주 하다. 노래 가사처럼 존재감 없음 보다 더 나아가 혐오의 대상마저 되어 버린 잡초를 드로잉 작가 김제민은 관심과 애정으로 바라본다. 작가의 표현을 인용해 보면, 잡초는 생긴 것부터 드로잉적이라고 한다. 바람의 방향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햇빛의 일조량과 비를 머금고 바람이 키워 낸다. 다분히 계획적이라기보다 날씨의 변화처럼 즉흥적이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후미진 언저리에 초대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어느 틈에라도 뿌리를 내리고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낸다. 도시의 건축물과 도로 정비에 손톱만큼의 허점이라도 생기면 어김없이 잡초들은 그 땅을 자신의 터전으로 영토화 한다. 작가는 이런 잡초의 속성과 생명력에 매력을 느꼈고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과 친근하면서도 측은한 동질감을 느꼈다고 한다. 여기서 작품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작가 김제민의 이력에 대해 설명이 필요한데, 작가는 한국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미국계 혼혈인이다. 미국에서 태어나서 5살 때부터 아버지의 나라인 한국에서 살고 있는 명백한 한국사람이다. 그러나, 아직도 보수적 순혈주의가 강세인 한국사회에서 혼혈인으로 자라면서 느꼈을 차별과 소외감은 미루어 짐작이 간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강인한 생명력과 적응력으로 살아가고 있는 잡초들을 통하여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 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작가는 아름답지도 주목받지도 못하며 무심하게 자라난 잡초들에게 어떻게 의미를 부여하고 생명력을 불어넣는지 살펴보기로 하겠다. 우선, 조형적으로 탄탄한 기본기 위에 표현의 섬세함과 집요함이 눈길을 끈다. 무심코 바라보면 한편의 풍경화 같지만, 자세히 보면 작가 자신의 감성이 은유되거나, 감추어져 있다. 작품의 컨셉과 표현기법은 매우 이상적으로 접점에 위치한다. 그래서 작품은 친근하면서도 가볍지 않은 게 장점이다. 하지만, 이 보다 더욱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은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텍스트들이다. 작품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게 정리해주는 작가의 언어 선택과 문장력은 작품을 보는 내내 미소 짓고 웃게 만든다. 그 웃음의 포인트도 뭔가 대단한 사건이나 에피소드가 아니라,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소함을 소재로 하고 있기에 작가의 연출력이 탁월하다. 웃음의 종류도 일종의 블랙 유머인데 예를 들면, 작품 "꺾이다"는 잡초 중에 우리가 흔히 강아지풀이라고 부르는 풀이 등장하는데, 머리가 무거워서인지 편견과 차별에 투영된 자신인지 줄기의 윗부분이 꺾여 있는 현상을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이 그림엔 말로 설명하기 쉽진 않지만, 현상에 비춰진 은유와 위트, 신선한 발상이 내포되어 있다. 사소함을 포착하여 비범하게 표현하는 능력의 정점은 작품 "유주얼 서스펙트(Usual Suspects)"에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에 나오는 다섯 명의 범죄자를 경찰서 벽에 세워 놓고 찍은 사진은 이 영화의 대표적 이미지이자, 영화의 고전이 되었다. 비슷한 맥락에서 도시의 무뢰한인 잡초들을 패러디한 감각은 작가 김제민의 그림이 가진 힘이다.
작가 인터뷰와 작품의 작업 과정을 보면서 나의 일상에 변화가 생겼다. 도시의 모퉁이에 무심히 자라고 있는 잡초들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일이다. 발걸음을 멈추고 2~3분만 투자하면, 삶의 여백이 주는 약간의 위로를 경험하게 된다. 그것이 숲 치유의 연장선상인지는 모르겠으나, 풀이 좋고, 살살 불어오는 바람이 있어 더욱 좋다. 오염이 심해지는 도시에 아직까지 풀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이 감사하다. ■ 손성진

잡초 그림 ● 오래 전의 대중가요 중에 가수 나훈아가 부른 '잡초'라는 노래가 있다. 가사의 내용을 요약 해보면 대충 이렇다. 아무도 찾지 않고 이름도 모르며 꽃도 피지 않고 손이 없어 님을 잡을 수도 발이 없어 님께 갈수도 없다는 잡초 입장에선 무능력하기 그지없는 내용이다. 결국엔 정체성과 존재감이 모호하고 매력도 능력도 미약하여 사랑하는 대상에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인데 잡초는 위의 가사 내용처럼 '쓸모없음'의 대명사이지만, 이외에도 강인한 생명력의 아이콘(icon)이기도 하다. 이것이 잡초가 갖고 있는 반전의 매력인데 지구상에 씨앗이 어떻게 뿌려 졌는지, 언제부터 생육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분명한 것은 지구상에 포유류가 탄생하고 정착하기 수십만 년 전부터 식물들이 이 땅의 주인이었다는 사실이다.

대략 46억년이 흐른 지금의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잡초들은 천덕꾸러기들이 되어 있다. 인간들은 애초에 주인이 누구인지, 망각하고 눈에 보이는 대로 뽑고 또 뽑고 없애느라 분주 하다. 노래 가사처럼 존재감 없음 보다 더 나아가 혐오의 대상마저 되어 버린 잡초를 드로잉 작가 김제민은 관심과 애정으로 바라본다. 작가의 표현을 인용해 보면, 잡초는 생긴 것부터 드로잉적이라고 한다. 바람의 방향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햇빛의 일조량과 비를 머금고 바람이 키워 낸다. 다분히 계획적이라기보다 날씨의 변화처럼 즉흥적이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후미진 언저리에 초대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어느 틈에라도 뿌리를 내리고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낸다. 도시의 건축물과 도로 정비에 손톱만큼의 허점이라도 생기면 어김없이 잡초들은 그 땅을 자신의 터전으로 영토화 한다. 작가는 이런 잡초의 속성과 생명력에 매력을 느꼈고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과 친근하면서도 측은한 동질감을 느꼈다고 한다. 여기서 작품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작가 김제민의 이력에 대해 설명이 필요한데, 작가는 한국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미국계 혼혈인이다. 미국에서 태어나서 5살 때부터 아버지의 나라인 한국에서 살고 있는 명백한 한국사람이다. 그러나, 아직도 보수적 순혈주의가 강세인 한국사회에서 혼혈인으로 자라면서 느꼈을 차별과 소외감은 미루어 짐작이 간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강인한 생명력과 적응력으로 살아가고 있는 잡초들을 통하여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 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작가는 아름답지도 주목받지도 못하며 무심하게 자라난 잡초들에게 어떻게 의미를 부여하고 생명력을 불어넣는지 살펴보기로 하겠다. 우선, 조형적으로 탄탄한 기본기 위에 표현의 섬세함과 집요함이 눈길을 끈다. 무심코 바라보면 한편의 풍경화 같지만, 자세히 보면 작가 자신의 감성이 은유되거나, 감추어져 있다. 작품의 컨셉과 표현기법은 매우 이상적으로 접점에 위치한다. 그래서 작품은 친근하면서도 가볍지 않은 게 장점이다. 하지만, 이 보다 더욱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은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텍스트들이다. 작품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게 정리해주는 작가의 언어 선택과 문장력은 작품을 보는 내내 미소 짓고 웃게 만든다. 그 웃음의 포인트도 뭔가 대단한 사건이나 에피소드가 아니라,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소함을 소재로 하고 있기에 작가의 연출력이 탁월하다. 웃음의 종류도 일종의 블랙 유머인데 예를 들면, 작품 "꺾이다"는 잡초 중에 우리가 흔히 강아지풀이라고 부르는 풀이 등장하는데, 머리가 무거워서인지 편견과 차별에 투영된 자신인지 줄기의 윗부분이 꺾여 있는 현상을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이 그림엔 말로 설명하기 쉽진 않지만, 현상에 비춰진 은유와 위트, 신선한 발상이 내포되어 있다. 사소함을 포착하여 비범하게 표현하는 능력의 정점은 작품 "유주얼 서스펙트(Usual Suspects)"에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에 나오는 다섯 명의 범죄자를 경찰서 벽에 세워 놓고 찍은 사진은 이 영화의 대표적 이미지이자, 영화의 고전이 되었다. 비슷한 맥락에서 도시의 무뢰한인 잡초들을 패러디한 감각은 작가 김제민의 그림이 가진 힘이다.

작가 인터뷰와 작품의 작업 과정을 보면서 나의 일상에 변화가 생겼다. 도시의 모퉁이에 무심히 자라고 있는 잡초들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일이다. 발걸음을 멈추고 2~3분만 투자하면, 삶의 여백이 주는 약간의 위로를 경험하게 된다. 그것이 숲 치유의 연장선상인지는 모르겠으나, 풀이 좋고, 살살 불어오는 바람이 있어 더욱 좋다. 오염이 심해지는 도시에 아직까지 풀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이 감사하다.

■ 손성진 (소마미술관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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